레온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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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레온 왕국은 910년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으로부터 분리되어 레온을 수도로 하여 건국된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왕국이다. 1037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1세가 레온 왕국의 계승권을 얻으면서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어 카스티야-레온 왕국을 형성했고, 1230년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에 의해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이 재통합되면서 소멸되었다. 레온 왕국은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여 레콩키스타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1188년 유럽 최초로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레온 코르테스를 소집하는 등 정치, 문화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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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세기 스페인 - 아스투리아스 왕국
718년 펠라요를 중심으로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서 우마이야 칼리파국에 저항하며 건국된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코바돈가 전투 승리, 오비에도 천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건설, 레콩키스타 발판 마련, 야고보 사도 수호 성인 책봉, 바이킹 침략 방어, 전로마네스크 건축 양식 발전, 산티아고 순례길 조성 등 중세 유럽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레온 왕국 - 알폰소 7세
알폰소 7세는 레온과 카스티야를 통합하고 "스페인 황제"를 자처하며 레콩키스타를 추진, 알모라비드 왕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알모하드 왕조의 부상과 왕국 분할 상속으로 내분을 겪고 레콩키스타 진전이 주춤하는 결과를 낳았다. - 레온 왕국 - 알폰소 9세
알폰소 9세는 레온 왕국의 왕으로, 카스티야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코르테스 소집, 살라망카 대학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사후 그의 아들 페르난도 3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통합했다. - 스페인의 역사 - 테르시오
테르시오는 16세기에서 18세기 초까지 스페인 군대의 핵심 보병 부대로, 파이크병, 총병 등으로 구성되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나 군사 개혁으로 인해 1704년 연대와 대대 체제로 개편되면서 소멸되었다. - 스페인의 역사 - 무어인
무어인은 어원적으로 "검다"는 의미를 가지며, 역사적으로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지칭했으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정복 시대의 아랍인, 베르베르인, 이슬람교도를, 현대에는 모로코, 모리타니 주민을, 필리핀에서는 무슬림 주민을 가리키는 등 시대와 지역에 따라 의미가 다양하게 변화되어 사용된다.
레온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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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910년, 가르시아 1세가 왕국의 수도를 레온으로 옮기면서 '''레온 왕국'''이 시작되었다.[10] 레온은 로마 제국의 레기오 VII 게미나 군단이 건설한 도시로,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군단 본부이자 인근 라스 메둘라스 금광의 무역 중심지였다. 569년 서고트족 왕 레오비길드에게 정복되었으나,[10] 가톨릭 주민들은 존중받았다. 717년 다시 무어인에게 함락되었지만, 742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의해 탈환되어 레콩키스타의 초기 거점 중 하나가 되었다.
레온은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속한 몇 안 되는 옛 로마 도시 중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서고트 시대 교구였던 레온은 무슬림 통치하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통일된 교회를 이끌고자 했던 아스투리아스 군주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알폰소 3세가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하면서 레온은 독립 왕국이 되었다. 가르시아 1세(910–914)가 레온을 수도로 정했고, 오르도뇨 2세(914–924)는 남쪽 세비야, 코르도바 등 이슬람 영토 깊숙이 원정대를 이끌었다.
프루엘라 2세, 알폰소 프로일라스, 알폰소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내전이 있었지만, 라미로 2세(931–951)가 왕위에 올라 왕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이슬람 군대를 격파하고 두에로 강 계곡을 무인지대로 만들었으며, 뛰어난 군사적 기량으로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온 군대의 진격과 함께 ''레포블라시온'' 과정이 진행되어 갈리시아 등지에서 온 사람들이 ''메세타'' 고원 평원을 재정착시켰고, 이는 레온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무데하르 미술이라는 독특한 예술 양식이 등장했는데, 이는 서고트, 이슬람, 비잔틴 요소가 혼합된 것이다. 산 미겔 데 에스칼라다와 산티아고 데 페냐바의 레온 교회가 대표적인 예이다.
10세기 초, 레온은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부르고스를 확보했다. 페르디난드 2세 카스티야 백작은 부르고스를 확장하고 독립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코르도바 칼리파국과 동맹을 맺어 레온을 희생시키며 영토를 확장하다가 966년 산초 1세에게 패배했다.
산초 1세 사후 5세의 라미로 3세(966–982)가 왕위에 올랐다. 968년 군로도 왕이 이끄는 바이킹 함대가 갈리시아를 침략하여 시스난도 주교를 죽였다.[11][12] 곤살로 산체스 백작이 바이킹을 격파하고 군로도를 처형했다.[13] 11세기까지도 바이킹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며, 1028년 울브 갈리시에파레르가 이끄는 대규모 습격이 있었지만 콤포스텔라 주교에게 패배했다. 1047년부터 1066년까지 크레스코니우스 주교가 바이킹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12]
레온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중요한 국가였지만, 나바라의 산초 3세가 1020년대에 카스티야를 점령하고 레온을 관리하면서 갈리시아는 잠시 독립했다. 그의 사후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백작위를 물려받았고, 1037년 레온 왕을 격파하고 레온과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1065년 사망할 때까지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백작령을 레온의 페르난도 1세로 통치했다.[14]
레온은 코르도바 칼리프의 북쪽에 위치했으며, 11세기 알-안달루스가 타이파로 분열되자 기독교 왕국들은 ''파리아스''(조공)를 요구할 수 있게 되었다. 페르난도 1세는 타이파로부터 막대한 부를 축적했고, 클뤼니 수도원의 후원자가 되었다. 성 야고보의 길은 순례자들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끌었고,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을 장려했다.
알폰소 6세는 중세 시대 레온의 중요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를 장악하고 스페인 황제로 즉위했다.[15]
2. 1. 아스투리아스 왕국 (718년-910년)
711년 무어인의 침략으로 서고트 왕국이 멸망한 후, 이베리아 반도 대부분은 이슬람 세력에게 지배당했다. 이슬람 지배하에서도 세금을 내면 모사라베라고 불리는 기독교인들은 이전 고트식의 고유 전례를 유지할 수 있었다. 722년, 서고트 왕국의 귀족이었던 펠라요는 코바돈가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현재 아스투리아 지방에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웠다. 이로써 이베리아 북부 산악 지역의 기독교 국가였던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슬람 국가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초기 레콩키스타의 중심지가 되었다.[10]791년에 즉위한 알폰소 2세 (760년 - 842년)의 치세 후반에는 알 안달루스에서 이주해 온 모사라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고트 방식의 종교 의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서고트 왕에 연계되는 가계도를 만들게 하여, 아스투리아스가 서고트 왕국의 계승자라는 "신고트주의"가 성립되었다.
알폰소 3세 시대에는 식민 활동과 교회 건설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기독교 포교에 힘썼다. 알폰소 3세는 세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시켰다.
2. 2. 레온 왕국 (910년-1230년)
910년, 가르시아 1세가 왕국의 수도를 군사적 거점인 레온으로 천도하면서, '''레온 왕국'''이라고 불리게 되었다.[10] 레온시는 로마 제국의 레기오 VII 게미나("쌍둥이 일곱 번째 군단")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해당 군단의 본부였으며, 인근 라스 메둘라스에서 채굴된 금의 무역 중심지였다. 569년, 이 도시는 아리우스파 서고트족 왕 레오비길드에게 정복당했는데,[10] 그는 이미 잘 정착된 가톨릭 교회의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았다. 717년, 레온은 다시 함락되었고, 이번에는 무어인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레온은 레콩키스타 기간 동안 가장 먼저 탈환된 도시 중 하나였으며, 742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이 시기 레온은 작은 도시였지만,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속한 몇 안 되는 옛 로마 도시 중 하나로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남아있는 로마 성벽은 중세 시대의 성벽을 지니고 있다). 서고트 시대에 이 도시는 교구로 사용되었으며, 아스투리아스에 이 도시를 통합함으로써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무슬림 세력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에 통일된 이베리아 교회를 이끌고자 했던 아스투리아스 군주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레온은 아스투리아스 왕 알폰소 대왕이 자신의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하면서 독립된 왕국으로 탄생했다. 레온은 가르시아 1세 (910–914)에게 상속되었고, 그는 아스투리아스 왕국의 수도를 레온으로 옮겼다. 그의 후계자는 오르도뇨 2세 (914–924)였다. 오르도뇨 2세 역시 군사 지도자였으며, 레온에서 남쪽의 세비야, 코르도바, 과달라하라까지 이슬람 영토 깊숙이 원정대를 이끌었다.
프루엘라 2세, 알폰소 프로일라스, 알폰소 4세의 통치 기간 동안 몇 년간의 내전이 벌어진 후, 라미로 2세 (931–951)가 왕위에 올라 왕국에 안정을 가져왔다. 자신의 영토에서 이슬람 군대를 격파한 용감한 군사 지휘관이었던 라미로의 원정으로 두에로 강 계곡은 이베리아 북부의 기독교 왕국과 남부의 이슬람 국가를 분리하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라미로 2세는 뛰어난 군사적 기량 때문에 이슬람인들에게 "악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레온 군대가 진격하면서 ''레포블라시온'' 과정이 이어졌는데, 이는 갈리시아, 특히 아스투리아스와 레온에서 온 사람들이 ''메세타'' 고원 평원을 재정착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아스투리아스와 레온 사람들의 이주는 레온어에 큰 영향을 미쳤다. ''레포블라시온'' 기간 동안 무데하르 미술로 알려진 독특한 형태의 예술이 등장했다. 무데하르 미술은 서고트, 이슬람, 비잔틴 요소가 혼합된 것이다. 무데하르 양식의 주목할 만한 예로는 산 미겔 데 에스칼라다와 산티아고 데 페냐바의 레온 교회가 있다.
10세기 초, 레온은 남쪽과 동쪽으로 확장하여 부르고스 군이 된 영토를 확보했다. 수많은 성으로 요새화된 부르고스는 930년대까지 레온에 속해 있었으며, 이 시기에 페르디난드 2세 카스티야 백작이 부르고스를 확장하고 독립적이고 세습적인 곳으로 만들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 그는 영토(부르고스 주변)의 많은 성을 언급하며 스스로를 카스티야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코르도바 칼리파국과 동맹을 맺어 레온을 희생시키며 자신의 지역을 계속 확장하다가 966년 산초 1세에게 패배했다.
산초 1세가 966년 말에 사망하고, 5세의 라미로 3세 (966–982)가 레온의 왕위에 올랐다. 그의 통치 2년째인 968년, 100척의 바이킹 함대가 군로도 왕이 이끄는 갈리시아에 상륙했다.[11] 바이킹은 갈리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콤포스텔라의 주교인 시스난도를 죽였다.[12] 포르넬로스 전투의 패배로 갈리시아는 바이킹에 맞설 수 있는 권력을 잃었고, 바이킹은 3년 동안 편안하게 진영을 치고 갈리시아 여러 지역을 약탈했다. 971년, 군로도와 그의 바이킹들은 곤살로 산체스 백작이 리아 데 페롤(그들이 배를 정박한 곳)로 돌아오는 길에 기습하여 격파했다. 갈리시아 군대는 군로도와 그의 전사들을 사로잡아 모두 처형했다.[13] 11세기까지도 스페인 북부에서는 산발적인 바이킹의 공격이 계속되었다. 1008년에는 갈리시아와 두에로 강 지역이 공격을 받았고, 1014년 또는 1015년에는 투이 시가 미뇨 강 하구에서 대규모 습격을 받았다. 바이킹은 주교와 많은 시민들을 성공적으로 사로잡았다. ''크뉘틀링가 사가''와 게스타 다노룸la은 이 사건 이후 1028년에 또 다른 대규모 습격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울브 갈리시에파레르가 이끌었고, 그는 리아 데 아로사 지역으로 가려고 했으며, 이후 로드리고 로마니스의 용병이 되었지만 콤포스텔라의 주교에게 패배했다. 마지막으로 기록된 습격은 1047년부터 1066년까지의 기간에 발생했는데, 콤포스텔라의 주교인 크레스코니우스가 바이킹과의 여러 전투에서 싸워 승리했다.[12]
레온 왕국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남았다. 그러나 나바라의 산초 3세(1004–1035)는 1020년대에 카스티야를 점령했고, 생애 마지막 해에는 레온을 관리했으며, 갈리시아는 잠시 독립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 영토 분할에서 그의 아들 페르난도가 카스티야 백작위를 물려받았다. 2년 후인 1037년, 그는 레온의 왕을 격파했고, 레온의 왕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페르난도가 레온 왕의 누이와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레온과 갈리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1065년 사망할 때까지 거의 30년 동안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백작령을 레온의 페르난도 1세로 통치했다.[14]
레온은 초창기에 강력한 코르도바 칼리프(Caliphate of Córdoba)의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11세기, 내부 갈등으로 알-안달루스(Al-Andalus)의 충성이 분열되어 칼리프의 작은 타이파(Taifa) 후계 국가 시대가 시작되자, 칼리프에게 조공을 바치던 기독교 왕국들은 특정 파벌에 대한 호의나 단순한 강탈의 대가로 지불을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파리아스'').
따라서 페르난도 1세는 이전 칼리프의 후계 영토의 문화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바르셀로나 백작과 아라곤 왕들의 예를 따라 타이파로부터 얻은 ''파리아스''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065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영토와 ''파리아스''는 그의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그 중 알폰소가 봉건적 계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제 간의 싸움에서 승리했다.[14]
유럽에서 이 고립된 왕국의 막대한 새로운 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의 주교들은 로마와 거의 접촉하지 않았는데, 페르난도와 그의 상속자(레온과 카스티야의 왕)가 클뤼니 수도원(Abbey of Cluny)의 가장 큰 후원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보트 휴(1109년 사망)는 모든 사람의 눈을 사로잡는 거대한 세 번째 수도원 교회를 건설했다. 성 야고보의 길(Way of Saint James)은 서유럽의 순례자들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성 야고보의 무덤으로 불렀고, 그 길을 따라 있는 대규모 숙소와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Romanesque architecture) 양식의 건물을 장려했다.
알폰소 6세는 중세 시대의 레온의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형제가 레온의 도시 사모라를 공격하다 사망하자 처음에는 레온을, 나중에는 카스티야와 갈리시아를 장악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왕들의 위에 있는 스페인 황제로 즉위했다.[15]
2. 3. 카스티야-레온 연합 왕국 (1230년-1833년)
1037년,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1세가 레온 왕국의 계승권을 갖게 되면서,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국에 병합되어 동군 연합인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되었다.[14] 페르난도 1세는 바르셀로나 백작과 아라곤 왕들의 예를 따라 타이파로부터 얻은 ''파리아스''(조공)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065년에 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영토와 ''파리아스''는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그 중 알폰소 6세가 형제 간의 싸움에서 승리했다.[14]알폰소 6세는 중세 시대 레온의 가장 중요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형제가 레온의 도시 사모라(Zamora, Spain)를 공격하다 사망하자 처음에는 레온을, 나중에는 카스티야와 갈리시아를 장악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의 모든 왕들 위에 있는 스페인 황제로 즉위했다.[15] 1085년 알폰소 6세의 톨레도 점령은 중세 이베리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톨레도는 기독교 세력이 정복한 최초의 주요 안달루시 도시였다. 현대 역사가들은 톨레도의 함락을 무어인 남부와의 관계에 기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보며, 연례 조공 갈취에서 노골적인 영토 확장으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1157년에 분열되었는데,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가 큰 패배를 겪으면서 카스티야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독립 레온 왕국(1157–1230)의 마지막 두 왕은 페르난도 2세와 알폰소 9세였다. 페르난도 2세는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도시인 메리다를 정복하는 레온을 이끌었다. 알폰소 9세는 엑스트레마두라 전체(카세레스와 바다호스 포함)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12년에 살라망카 대학교를 설립하고 1188년에 유럽 최초로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의회인 레온 코르테스를 소집하여 당대 가장 현대적인 왕이었다.[16]
알폰소 9세는 죽은 후 그의 왕국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의 상속자를 첫 번째 아내의 딸인 산차와 둘체로 지정했다. 레온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아폰소 9세는 그의 유언장에 갈리시아 상속권을 적용하여 남녀 모두에게 상속 평등을 부여하여 딸들이 레온의 미래 여왕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알폰소 9세가 1230년에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베렌게라의 아들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레온을 침공하여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한 이후 처음으로 두 왕국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통합은 레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분리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고, 그의 아들 알폰소 10세는 레온 왕국의 독립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아들과 계승자 카스티야의 산초 4세에 의해 존중되지 않았고, 그의 형제 존은 산초의 전년 사망 후 1296년까지 기다렸다가 레온, 갈리시아, 세비야의 왕인 존 1세로 즉위했다. 1301년에 그는 퇴위했고, 카스티야의 왕이 레온 왕위를 차지하여 두 왕국을 재결합했다.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들은 처음에는 레온의 왕이라는 명칭을 상위 명칭으로 계속 사용했고, 국기의 일부로 사자를 사용했지만, 사실 권력은 카스티야에 집중되었으며, 레온어가 카스티야어로 대체된 것이 그 예이다.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현대 시대까지 서로 다른 의회, 서로 다른 국기, 서로 다른 화폐, 서로 다른 법률을 유지했으며,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정부 권력을 중앙 집권화했다.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관 아래 개인 연합으로 공존했으며, 레온은 자체적인 기관을 보유했다. 예를 들어 자체적인 코르테스, 레온 왕국의 레알 아델란타미엔토, 레온의 메리노 마요르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19세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군주들은 곧 시에테 파르티다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두 왕국의 법을 통합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6세기까지 레온은 사령관-일반이 되었다.
2. 4. 19세기 이후
19세기에 레온은 갈리시아, 아스투리아스와 함께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하고 자체 정부인 ''레온 왕국 일반 후안타''를 조직했다. 현대의 레온 지역은 1833년에 설립되었으며[27] 레온, 사모라, 살라망카 주로 나뉘었다.현재 레온은 레온, 사모라, 살라망카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페인 왕국 내 카스티야이레온 자치 공동체의 일부이다.
레오네시즘을 대표하는 정당, 레온 지역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은 카스티야에서 분리된 자치 공동체의 생성을 지원한다. 레오네시스트 정당은 2007년 레온 자치 선거에서 13.6%의 득표율을 얻었다. 또한 레온을 위한 NUTS-2(유럽 통계 지역) 설립을 위해 일부 레온 시의회에서 승인한 이니셔티브가 있었다.
3. 레오네시즘
레온은 레온, 사모라, 살라망카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 스페인 왕국 내 카스티야이레온 자치 공동체의 일부이다.
레오네시즘은 레온 지역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을 말하며, 카스티야에서 분리된 자치 공동체의 생성을 지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레오네시스트 정당은 2007년 레온 자치 선거에서 13.6%의 득표율을 얻었다. 또한 일부 레온 시의회에서 레온을 NUTS-2(유럽 통계 지역)으로 설립하기 위한 이니셔티브를 승인한 바 있다.
4. 문화
10세기에 시작되어 유럽 로마네스크 시대까지 번성했던 레온 왕국의 미술은 알안달루스의 영향이 두드러진 무사라브 미술로 알려져 있으며, 서고트족과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18]
"베아토스"와 같은 삽화 필사본은 비잔틴-메로빙거의 영향에서 이슬람-카롤링거적 특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소를 통합하여 레온 미술의 생동감과 진화를 보여준다.[21]
11세기와 12세기에는 로마네스크 미술의 도래로 레온 예술 표현에 큰 변화가 나타났으며, 레온 대성당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이전 대성당의 기초가 놓였다.[22] 이 시기에는 조각과 금세공도 더욱 번성했다.
4. 1. 건축
레온은 로마 제국의 레기오 VII 게미나(쌍둥이 일곱 번째 군단)에 의해 건설되었다.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 이 도시는 해당 군단의 본부였으며, 인근 라스 메둘라스에서 채굴된 금의 무역 중심지였다.[10]
10세기에 시작되어 유럽 로마네스크 시대까지 번성했던 레온 왕국의 미술은 독특한 영향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데, 특히 알안달루스의 영향이 두드러져 전통적으로 무사라브 미술로 알려졌다. 이러한 예술적 표현은 서고트족과 코르도바 칼리파국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소규모의 단일 통로 교회에서 정교한 수도원 단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구조물을 만들어냈다.[18]
왕과 교회 지도자를 포함한 주요 인물들은 이 예술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으며, 안달루스 풍의 영향이 두드러졌다.[19]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레온의 미술은 다양한 전통을 성공적으로 융합하여 프리 로마네스크 미술의 맥락 안에서 독특한 양식을 창조했다. 주목할 만한 특징으로는 건축 양식의 혼합, 모딜리온 또는 말굽 아치와 같은 다양한 예술적 요소의 실험, 로마와 칼리파 양식의 영향을 받은 벽화 기법의 사용 등이 있다.[20]
11세기와 12세기에는 로마네스크 미술의 도래가 레온 예술 표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산 이시도로 성당과 같은 걸작들은 로마네스크 조각과 회화의 뛰어난 사례가 되었다. 이 시기는 또한 레온 대성당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이전의 대성당의 기초를 놓았다.[22]
4. 2. 종교
레온은 로마 제국의 레기오 VII 게미나 군단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후기 로마 제국 시대에는 군단의 본부이자 금 무역 중심지였다. 569년 서고트족 왕 레오비길드에게 정복당했지만, 가톨릭 교회 주민들을 괴롭히지 않았다.[10] 717년 무어인에게 함락되었으나, 742년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의해 탈환되었다.이 시기 레온은 작은 도시였지만,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속한 옛 로마 도시 중 하나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서고트 시대에 교구로 사용되었으며, 아스투리아스에 통합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이 무슬림 세력에 의해 통치되던 시대에 통일된 이베리아 교회를 이끌고자 했던 아스투리아스 군주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했다.
711년 서고트 왕국 멸망 후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교도에게 지배당했다. 이슬람교도의 지배 하에서 세금을 지불하는 대신 서고트식의 독자적인 전례를 유지한 기독교도들이 있었고, 모사라베라고 불렸다. 북부 산악 지대의 기독교 국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이슬람 국가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했다.
722년 서고트 왕국의 귀족 펠라요는 코바동가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격파했고, 이후 아스투리아스 지방은 레콩키스타의 거점이 되었다.
791년에 즉위한 알폰소 2세는 알안달루스에서 이주해 온 모사라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고트 방식의 종교 의식을 부분적으로 채택하고, 서고트 왕에 연계되는 가계도를 만들게 하여, 아스투리아스가 서고트 왕국의 계승자라는 "신고트주의"가 성립되었다.
알폰소 2세의 궁정·교회 조직은 아헨과 톨레도를 모델로 정비되었다. 알폰소 2세는 종말론을 사상적 배경으로 하면서, 서고트 왕국과의 연속성을 주장했지만, 8세기 이래 모사라베 교회에서 주류가 되었던 양자설은 채용하지 않았다.
알폰소 3세 시대에는 기독교 포교에 힘썼다. 알폰소 3세는 세 아들에게 왕국을 분할 상속시켰다.
11세기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순례지로 알려지면서, 프랑스인 순례자들을 끌어들였다. 순례의 길은 "프랑스인의 길"이라고 불렸다. 수호성인으로는 레온 왕국의 성 이시도로가, 민중의 가장 중요한 신앙 대상은 성모 마리아였다.
프랑스인들은 클뤼니 수도원의 개혁 정신을 스페인에 가져왔다. 알폰소 6세가 1085년에 톨레도를 공략하자, 톨레도 대주교를 클뤼니파 인물에게 임명했다.
알폰소 6세는 "두 종교의 황제"를 자칭한 것처럼, 이슬람교도와의 공존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클뤼니나 개혁파 교황이 칭송하는 십자군적인 성전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개혁파 교황은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내세우며 서 로마 제국의 고지가 교황에게 헌상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레고리오 7세가 이베리아 반도에 수위권을 주장하자, 알폰소 6세는 "히스파니아 황제" 또는 "톨레도 황제"를 자칭하며 견제했다. 알폰소 6세는 클뤼니에 막대한 기증을 함으로써 교황권에 대한 방벽으로서 클뤼니를 이용하려고 했다.
알폰소 6세는 모사라베 전례에서 로마식 전례로의 이행에 응하여 히스파니아 교회를 개혁했다. 1090년의 레온 교회 회의에서 서고트 문자의 사용이 금지되고, 카롤링거 문자가 의무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6세는 서고트 문자를 계속 사용했다.[25]
4. 3. 문장학

11세기와 12세기에 로마네스크 미술이 레온에 들어오면서 예술 표현에 큰 변화가 있었다. 레온의 산 이시도로 성당과 같은 건축물들은 로마네스크 조각과 회화의 뛰어난 예시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레온 대성당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의 로마네스크 이전 대성당의 기초가 놓였다.[22] 조각, 금세공, 문장학도 발전하였으며, 레온의 알폰소 9세는 개인적인 문장 사용을 시작하여 중세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문장의 시각적 표현에 기여했다.
5. 정치
현재 레온은 레온, 사모라, 살라망카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스페인 왕국 내 카스티야이레온의 자치 공동체의 일부이다.
레오네시즘을 대표하는 정당, 레온 지역주의 및 민족주의 운동은 카스티야에서 분리된 자치 공동체의 생성을 지원한다. 레오네시스트 정당은 2007년 레온 자치 선거에서 13.6%의 득표율을 얻었다. 또한 레온을 위한 NUTS-2(유럽 통계 지역)을 설립하기 위해 일부 레온 시의회에서 승인한 이니셔티브가 있었다.
1085년 알폰소 6세의 톨레도 점령은 중세 이베리아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는데, 톨레도는 기독교 세력이 정복한 최초의 주요 안달루시 도시였기 때문이다. 현대 역사가들은 톨레도의 함락을 무어인 남부와의 관계에 기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보며, 연례 조공 갈취에서 노골적인 영토 확장으로 전환되었다고 본다. 알폰소 6세는 톨레도 내부의 갈등으로 지역 정치에 끌려들어갔고 도시 국가의 정치적 동맹을 물려받았다. 그는 톨레도에 가톨릭 주교를 임명하고 처리하는 문제, 그리고 톨레도에 의존하며 알-안달루스와 마그레브와의 교역으로 왕의 호의를 얻는 소규모 무슬림 거점인 ''타이파''에 수비대를 배치하는 문제와 같이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문제에 직면했다. 따라서 알폰소 6세는 정교한 도시, 무슬림 신민 및 증가하는 기독교 인구가 있는 대도시를 통치하면서 가톨릭 왕으로서의 역할이 재정의되었다.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1157년에 분열되었는데, 카스티야의 알폰소 7세가 큰 패배를 겪으면서 카스티야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독립 레온 왕국(1157–1230)의 마지막 두 왕은 페르난도 2세와 알폰소 9세였다. 페르난도 2세는 로마 시대부터 존재했던 도시인 메리다를 정복하는 레온을 이끌었다. 알폰소 9세는 엑스트레마두라 전체(카세레스와 바다호스 포함)를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12년에 살라망카 대학교를 설립하고 1188년에 유럽 최초로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의회인 레온 코르테스를 소집하여 당대 가장 현대적인 왕이었다.[16]
알폰소 9세는 죽은 후 그의 왕국이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의 상속자를 첫 번째 아내의 딸인 산차와 둘체로 지정했다. 레온 왕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아폰소 9세는 그의 유언장에 갈리시아 상속권을 적용하여 남녀 모두에게 상속 평등을 부여하여 딸들이 레온의 미래 여왕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알폰소 9세가 1230년에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베렌게라의 아들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3세가 레온을 침공하여 왕위를 차지했다. 그는 1157년 알폰소 7세가 사망한 이후 처음으로 두 왕국의 공동 군주가 되었다. 고립된 대서양 지방인 포르투갈 백국은 1139년에 독립하여 포르투갈 왕국이 되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통합은 레온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페르난도 3세는 레온 왕국의 분리주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2년이 걸렸고, 그의 아들 알폰소 10세는 레온 왕국의 독립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아들과 계승자 카스티야의 산초 4세에 의해 존중되지 않았고, 그의 형제 존은 산초의 전년 사망 후 1296년까지 기다렸다가 레온, 갈리시아, 세비야의 왕인 존 1세로 즉위했다. 1301년에 그는 퇴위했고, 카스티야의 왕이 레온 왕위를 차지하여 두 왕국을 재결합했다.
카스티야와 레온의 왕들은 처음에는 레온의 왕이라는 명칭을 상위 명칭으로 계속 사용했고, 국기의 일부로 사자를 사용했지만, 사실 권력은 카스티야에 집중되었으며, 레온어가 카스티야어로 대체된 것이 그 예이다. 레온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현대 시대까지 서로 다른 의회, 서로 다른 국기, 서로 다른 화폐, 서로 다른 법률을 유지했으며,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정부 권력을 중앙 집권화했다.
레온 왕국은 카스티야 왕관 아래 개인 연합으로 공존했으며, 레온은 자체적인 기관을 보유했다. 예를 들어 자체적인 코르테스, 레온 왕국의 레알 아델란타미엔토, 레온의 메리노 마요르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다수는 19세까지 존속했다. 그러나 카스티야 군주들은 곧 시에테 파르티다스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두 왕국의 법을 통합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6세기까지 레온은 사령관-일반이 되었다.
6. 주요 인물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가르시아 1세 | 910년–914년 | 알폰소 대왕의 아들, 레온 왕국 상속 및 수도 이전 |
오르도뇨 2세 | 914년–924년 | 가르시아 1세의 후계자, 군사 지도자, 남쪽 세비야, 코르도바, 과달라하라까지 원정 |
프루엘라 2세, 알폰소 프로일라스, 알폰소 4세 | 해당사항 없음 | 통치 기간 동안 내전 발생 |
라미로 2세 | 931년–951년 | 왕국 안정, 이슬람 군대 격파, 두에로 강 계곡 무인지대화, "악마" 별명 |
페르난도 1세 | 1037년-1065년 | 나바라의 산초 3세의 아들, 카스티야 백작, 레온 왕 격파, 레온과 갈리시아 왕, 파리아스로 부 축적[14] |
알폰소 6세 | 해당사항 없음 | 중세 레온의 주요 왕, 형제 사후 레온, 카스티야, 갈리시아 장악, 스페인 황제 즉위[15]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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